고뒤스키와 마네즈의 본업은 음악가. 작곡과 연주를 하는, 음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평범한 음악인이었다. 음악과 필름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두 음악가는 화학약품과 암실을 이용한 취미생활을 즐겼다.
1865년쯤, 제임스 클락 맥스웰이 영사기를 사용, 원시적인 칼라화면을 만들어 내긴 했으나 영상은 너무나 흐릿해서 사물의 세세한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발명으로 인해, 과학자들은 칼라필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의 반세기동안 칼라필름에 대한 기술은 제자리걸음에 있었던 것이다. 칼라필름에 대한 두 음악가의 관심은 단순한 흥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온갖 과학상식을 동원, 필름 만들기를 해왔다. 맥스웰 방식의 칼라사진 재현에 성공한 그들은 자연의 색을 또렷이 나타내는 칼라사진을 원했고, 맥스웰이 시도했던 광학적 방식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고 판단, 다른 길을 엿보기 시작했다. 이들이 선택한 새로운 해결책 화학적 방법.
두 음악가는 자신들의 수입을 모두 쏟아 부으면서까지 실험에 몰두했다. 다행이 이 "별난 사람"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이들이 있어 경제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적극적인 후원자는 이스트만 코닥사의 미즈박사.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코닥사의 연구소장인 미즈는 재정적인 도움은 물론, 화학재료와 실험실까지 지원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다.
두 사람이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은 유상액이라 불리는 얇은 막. 접착제의 재료로 쓰이는 이 얇은 막이 칼라사진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유상액의 얇은 막은 빛의 양에 따라 여러 가지 색으로 변화하므로 필름 제조상에서 사용량과 빛의 양만 조절하면 자연 그대로 색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문제는 빛의 양을 조절하는 시간을 맞추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실험실에서는 끊임없이 노래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도 거의 매번 비슷한 음악으로… 이에 대한 주위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필름을 만들겠다고 나선 음악가들이 실험실에서 노래나 부르니, 당시 화학분야에서 쟁쟁하게 이름이 나있는 코닥사 직원들이 반길 리가 없었고, 직원들은 노골적으로 두 음악가를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노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컴컴한 암실에서 시간 감각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한 소절이 끝나면 3분, 두 소절이면 6분, 그런 식이었죠."
그들의 작업에 있어 시간 감각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조금만 늦거나 빨라도 필름이 나타내는 색이 완전히 틀려질 수 있었으므로 가장 적당한 시간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디지털시계가 없었으므로 암실에서 시계를 볼 수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고생을 하고도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결국 노래가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음악과 함께 필름에 매달린 지 19년. 두 음악가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칼라필름 제조에 성공했다.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비웃었던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면서, 두 사람은 음악가라는 호칭 외에 발명가라는 직함을 정식으로 얻게 되었다.
출처 : Scienceall>지식all>톡톡! 사이언스 스토리>재미있는 발명이야기 「음악가가 발명한 칼라필름」- 한국발명진흥회 왕연중
오늘의 과학문화사 (11월 6일)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 1952년 미국 태평양 에니웨트크 섬에서 수소폭탄 실험
1865년쯤, 제임스 클락 맥스웰이 영사기를 사용, 원시적인 칼라화면을 만들어 내긴 했으나 영상은 너무나 흐릿해서 사물의 세세한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발명으로 인해, 과학자들은 칼라필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의 반세기동안 칼라필름에 대한 기술은 제자리걸음에 있었던 것이다. 칼라필름에 대한 두 음악가의 관심은 단순한 흥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온갖 과학상식을 동원, 필름 만들기를 해왔다. 맥스웰 방식의 칼라사진 재현에 성공한 그들은 자연의 색을 또렷이 나타내는 칼라사진을 원했고, 맥스웰이 시도했던 광학적 방식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고 판단, 다른 길을 엿보기 시작했다. 이들이 선택한 새로운 해결책 화학적 방법.
두 음악가는 자신들의 수입을 모두 쏟아 부으면서까지 실험에 몰두했다. 다행이 이 "별난 사람"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이들이 있어 경제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적극적인 후원자는 이스트만 코닥사의 미즈박사.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코닥사의 연구소장인 미즈는 재정적인 도움은 물론, 화학재료와 실험실까지 지원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다.
두 사람이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은 유상액이라 불리는 얇은 막. 접착제의 재료로 쓰이는 이 얇은 막이 칼라사진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유상액의 얇은 막은 빛의 양에 따라 여러 가지 색으로 변화하므로 필름 제조상에서 사용량과 빛의 양만 조절하면 자연 그대로 색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문제는 빛의 양을 조절하는 시간을 맞추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실험실에서는 끊임없이 노래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도 거의 매번 비슷한 음악으로… 이에 대한 주위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필름을 만들겠다고 나선 음악가들이 실험실에서 노래나 부르니, 당시 화학분야에서 쟁쟁하게 이름이 나있는 코닥사 직원들이 반길 리가 없었고, 직원들은 노골적으로 두 음악가를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노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컴컴한 암실에서 시간 감각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한 소절이 끝나면 3분, 두 소절이면 6분, 그런 식이었죠."
그들의 작업에 있어 시간 감각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조금만 늦거나 빨라도 필름이 나타내는 색이 완전히 틀려질 수 있었으므로 가장 적당한 시간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디지털시계가 없었으므로 암실에서 시계를 볼 수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고생을 하고도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결국 노래가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음악과 함께 필름에 매달린 지 19년. 두 음악가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칼라필름 제조에 성공했다.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비웃었던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면서, 두 사람은 음악가라는 호칭 외에 발명가라는 직함을 정식으로 얻게 되었다.
출처 : Scienceall>지식all>톡톡! 사이언스 스토리>재미있는 발명이야기 「음악가가 발명한 칼라필름」- 한국발명진흥회 왕연중
오늘의 과학문화사 (11월 6일)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 1952년 미국 태평양 에니웨트크 섬에서 수소폭탄 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