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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movies

Eternal sunshine

by ciwhiz 2012. 5. 7.
 

 


Blessed are th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 by Friedrich Wilhelm Nietzsche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순결한 처녀인들 과연 행복할까?
잊혀진 세상에 의해 세상은 잊혀진다.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이여!
어느 이뤄진 기도와 무산된 소망…


- Alexander Pope 의 <Eloisa to Abelard> 中

지워버린 기억을 찾아서

 

기억과 망각의 대결을 통해 인류의 영원한 테마인 사랑의 신화에 도전한다.

 

<이터널 선샤인>을 보자마자 기억으로부터 사라지기 전에 메모해 둔 것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찰리 카우프만은 대단히 영리한 작가이며, 고급 문화의 주제들을 대중적으로 ‘각색’하는 솜씨가 탁월한 작가라는 사실이다. 영화의 핵심을 이루는 ‘기억’들은 시간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소설 속에서 떠오르는 기억들은 유동적이고, 때로는 길게 늘어나는가 하면, 심지어 건너뛰기도 한다. 찰리 카우프만은 오늘날 명성이 자자하지만 거의 읽지 않는 작가인 프루스트의 난해한 스타일과 잊혀진 주제를 대중적으로 각색하기 시작한다. 그는 ‘잃어버린’이라는 모호한 말 대신 ‘지워버린’ 혹은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을 찾아 헤매는 조엘(짐 캐리)을 내세운다. 여기에도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SF영화의 관습을 슬쩍 빌려와 기억을 지워버리는 장치를 선보인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대단히 정교한 SF의 상상력이나 테크놀로지가 전시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조엘과 그가 사랑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기억 속에서 떠도는 공간은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CG와 카메라 트릭을 최대한 배제한 <이터널 션사인>은 모타우크 해변, 웨인스콧의 저택, 브루클린의 바, 메디슨 스퀘어 공원, 찰스 강, 125번지 지하철 역 등 저명한 뉴욕의 명소를 사실 그대로 담아냈다. 기억을 지우는 프로그램이라는 설정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영화가 보여 주는 것은 미래의 상상적 공간이 아니다. 뉴욕의 살아 있는 공간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연인들의 숨쉬는 욕망을 대변한다. 영화 속에서 조엘의 기억은 2003년 혹은 2004년의 현재적 공간 속에 주로 머물러 있다.

물론 기억을 지우는 프로그램 때문에 이야기 전개상 편리해 진 이점은 있다. 다소 애매한 장면들이 제시되기는 하지만 기억과 시간을 자유롭게 번지 점프하는 프루스트의 작품에 비하자면, 미셸 공드리의 영화는 대단히 친절하고 순차적으로 기억의 역순을 따라 전개된다. 시작과 끝에서 기억을 삭제한 연인들이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조엘이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워버리기로 결심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 사건은 이 과정에서 일어난다. 주인공 조엘은 사랑의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 중에 이를 자각하게 되고, 지워져가는 사랑의 기억을 붙잡고자(마치 가위에 눌린 상태에서 깨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발버둥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한 노력은 클레멘타인과 함께 프로그램의 지도에 없는 다른 기억의 공간으로 달아나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지고, 기억 속에서 만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부끄러운 기억들을 헤집으며 삭제 프로그램으로 부터 달아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양한 해프닝으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조엘이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도망을 치자 그의 몸집은 아이 때처럼 줄어든다.

이러한 설정과 상상력은 기억은 가상이 아니라 가장 실재적인 것이며, 기억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을 규정한다는 프루스트의 명제에 충실한 것이다. <이터널 션사인>은 프루스트의 소설이 그랬듯이 기억을 삭제하는 과정을 통해(그것은 역설적으로 기억을 되살려 보여 주는 과정이 된다.) 사건의 흐름과 시간 순서를 아주 체계적으로 망쳐놓는다. 이 영화의 진정한 쾌감은 여기에 있다. 기억 속에서 현실을 깨달은 조엘의 노력을 통해 영화는 주인공에게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불어넣는다. 조엘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은 안타까워하면서, 저항하고, 달아나기 시작한다. 기억 삭제 장치의 개발자인 '하워드 미에즈윅' 박사는 다른 기억 속으로 숨어버린 조엘을 찾아 삭제 프로그램을 진행시킨다. 기억과 망각의 대결, 혹은 기억과 망각의 갈림길은 사랑의 상실감을 몸소 체험하면서 뒤죽박죽이 되어가는 한 남자의 초상을 보여 준다.

결국 기억 속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더 이상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조엘의 기억이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났던 순간에 이르렀을 때(기억 프로그램은 가장 최근 사건부터 삭제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처음 만난 기억은 마지막 삭제 대상이다) 그들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대화를 나눈다. “클레멘타인: 조엘, 이것도 곧 사라지게 될 거야.” “조엘 : 알아.” “클레멘타인: 어떡하지?” “조엘: 즐겨야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사라져버리는 기억을 향해, 모든 기억이 소멸되기 직전에 어떡해야 좋을지를 묻는 연인을 향해 “즐겨야지”라고 답하는 조엘의 대사만큼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언어도 드물 것이다. 사랑이(결국 기억이) 지워지는 순간까지도 두 사람은 철저하게 즐기기로 결심한다. 그것이야말로 사랑을 제대로 끝내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므로. 이 영화의 제목이 ‘이터널 션사인’이라고 붙여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기억 삭제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랑을 기리고 추억하기 위한 일종의 영화적 트릭이기도 하다. 기억 삭제를 빌미로 관객들은 조엘의 추억을 따라 그들만의 아름다운 공간이 한때 얼마만한 사랑으로 빛났었는지, 그러나 사랑이 지나 버린 후에는 얼마만한 비극으로 암울해졌는지를 동시에 관람하고 있는 셈이다. 카우프만의 빛나는 각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터널 션사인>은 조엘의 기억이 삭제된 후 보다 또 다른 인간학을 풀어놓는다. 기억이 지워진 두 사람은 아주 우연히 그들이 처음 만났던 모타우크의 바닷가에서 마주치게 되고, 한밤중에 다시 만나 찰스 강의 얼음판 위에서 별자리를 이야기 한다. 그것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만남을 반복하는 행위다. 기억이 삭제된(그러므로 실존적인 죽음을 맞이한) 두 사람이 동일한 장소에서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이터널 션사인>은 ‘영원 회귀’의 신화를 끌어들인다.

영원 회귀는 지금 네가 사는 삶을 수없이 반복해서 또다시 살 거라고, 따라서 네 삶에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네 삶에 있던 모든 고통과 기쁨, 모든 생각과 한숨들이 똑같이 되풀이될 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원 회귀에 철학적 무게를 입힌 니체에 따르자면, 영원 회귀는 우리의 현재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상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든 그것이 또다시 되돌아와 우리가 그것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며,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타이름에 다름 아니다.

<이터널 션사인>에는 기억 삭제로 인한 비극을 경험하는 또 다른 커플이 등장한다. 영화 중후반부에 기억 삭제 장치의 개발자인 '하워드 미에즈윅' 박사와 그를 사랑하는 간호사 메리(커스틴 던스트)의 비밀이 폭로되는데, 메리는 하워드 박사가 조엘의 기억을 삭제하는 동안 박사에게 다가가 키스를 하고, 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박사의 아내가 이곳을 찾아오면서 두 사람 사이의 과거가 폭로된다. 메리가 박사를 사랑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박사를 사랑했던 과거 때문에 자신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기억을 삭제한 후에도 조엘과 클레멘타인, 하워드와 메리는 과거의 사랑을 반복하면서 서로에게 충실하지 못한 것을 다시금 후회하게 된다. 현실에 충실하라는 교훈은 영원회귀의 신화를 깔고 있는 <이터널 션사인>의 마지막 교훈이다.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과 미셀 공드리 감독이 인간의 본성과 인간 신화에 대한 탐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전작 <휴먼 네이쳐>에 처음으로 손을 잡고 제목 그대로 ‘인간 본성’에 대한 코미디 교본을 선보였다. 숲으로 하이킹을 떠난 라일라와 나단이 야생의 삶을 사는 퍼프를 만나면서 벌이게 되는 해프닝은 인류의 문명을 뒤집는 독특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행동주의 심리학자인 나단은 퍼프를 재료 삼아 자신의 예절 교육 실험을 완성하고자 하지만 그 과정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문명이 아니라 잠재된 인간의 본성들이다. <이터널 션사인>을 통해 카우프만과 공드리는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심각한 주제인 사랑의 신화에 도전한다.

사랑의 본질은 기억과 망각 속에서 혼돈하는 인간이 미처 습득하지 못한 문명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영화는 노래한다. “언젠가 배우게 되겠지”라고. 언젠가 다가올지도 모를 미래의 시간에 말이다.

 

2005.11.14 / 이상용(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