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이란 말은 우리가 늘 듣고, 쓰지만, 정작 그 정확한 뜻이나 의미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순히, 기분이 좋거나, 기쁜 일이 있으면 무의식중에 “행복하다”라고 말할 뿐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말은 기분좋다, 기쁘다와 동의어라고 보면 되는 것일까. 행복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복된 좋은 운수,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한다. 다음은, 카렌 케이시라는 작가의 『내안에 살고 있는 너를 위하여』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Happy’라는 말의 어원은 ‘Hap'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 Happy는 우연 (Chance)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불운 (mishap) 이나 사건(happening)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어떤 의미에서 행복은 행운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인생에서 갑작스러운 행운을 잡은 사람을 보고 행복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행복은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요? 만약 우리가 앞에 놓여 있는 컵을 바라보면서 “물이 절반이나 비었어...”라는 말 대신에 “물이 절반이나 남아 있어.”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인생의 실패를 또 다른 기회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행복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마치 근육과 같은 것입니다. 근육은 사용할수록 강해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그 일에 대응해야 합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행복을 맞이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행복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몇 년 전 경제발전이 미진한 제 3세계 국가의 국민들이 오히려 선진국들의 국민들 보다 행복체감지수가 높다는 기사가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스스로 ‘행복하다’라고 느끼는 잣대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은 별로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다. 개개인이 살면서 추구하는 가치는 다양하다. 금전적인 富, 명예, 권력, 사랑, 우정, 기쁨. 자아..등등 이러한 가치들을 통해 인간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다’ 라는 판단을 하게 되는 공통적인 기준은 바로 ‘만족감(Satisfaction)'이다. 개인마다 모두 자신만의 성격과 성향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성격, 성향 차이에서 오는 개인적인 만족감은 곧 행복에 대한 상대성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어떻게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일까란 첫 번째 질문에는 행복을 느끼는 것은 어차피 상대적이므로 굳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일지를 묻는다면 행복을 느끼는 모든 사람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이어서, “어떻게 될 수 있을까?”라는 두 번째 물음은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같지만, 의외로 답은 이미 나와있다. 말그대로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답은 알지만, ’현재에 만족해라‘ 라는 너무 간단해서 허무할 법한 행복에 이르는 이 답 ’안분지족‘은 21C를 사는 우리 나라 사람들에겐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나를 얻으면 그 다음 것을 원하게 되는 인간의 속성상, 위에서 언급한 많은 가치들 중 어느 것도 인간에게 만족의 ’끝‘ 이라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일생을 살며, 순간순간 “행복하다”라는 말을 할 때가 있으며, 이는 비록 당시에 느끼는 행복감에 나온 말이지만, 행복감을 느낀다는 사실은, 어쩌면 영원한 행복은 이루기 힘들지 모르지만, ’인간이 순간적이나마 행복을 느끼고, 그것을 빈번히 느끼거나, 계속 이어갈 수 있다면, 영원한 행복에 한 걸음쯤은 다가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던져준다. 이러한 순간의 행복들은 앞서 말한 가치들의 충족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가치들을 충족시키고,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에 대해 교육(敎育)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교육(敎育)’의 사전적 의미는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줌‘ 이라고 되어있다. 인간은, 특히 현대인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생 또는 삶이라는 교육의 현장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학문적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 뿐 아니라 인격을 길러준다는 의미는 바로 인생에서 그 사람이 추구해야할 가치를 제안해주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또는 제도)를 들여다보면, 작금 우리나라의 교육이 과연 본래의 목적대로 잘 행해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아니 그 전부터 친구들과 경쟁을 시작한다. 요즈음 대부분 우리나라의 초중고생 아이들 아니, 어쩌면 학부모들일지 모르겠다. 이들의 최대목표는 명문대학교의 입학이다. 즉, 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최대의 가치가 바로 일류 명문대의 입학인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이상 경쟁은 불가피하다. ’명문대생‘ 이라는 상징이 현대사회에 새로이 생겨난 계급 아닌 계급이 된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교육제도마저 이 한 가지 가치에 매달리게 되는 것은 교육의 본연의 목적을 놓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가치들에 대해 제안하고, 아이들은 그 다양한 가치들에 대한 간접경험들을 통해 그 중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가치를 선택한다. 그리고 아이가 선택한 가치는 어느 것이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올바른 판단, 비판능력과 의사표현 능력을 길러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교육해야할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이 아닐까. 학업 외적인 것들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인 시각 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그릇된 의식은 교육이 아니면 바꾸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육으로부터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의 의식은 만들어진다.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에 있는 것이지, 백년 동안 입시준비를 하기 위한 교육은 아닐 것이다. 도덕, 윤리 수업시간에 “직업에 귀천은 없다”라고 배우는 학생들에게, 명문대입학의 필요성을 설명해야하는 교사들이 겪는 이율배반적인 느낌이 우리나라 교육의 모순점을 보여주는 웃을수도 울수도 없는 일례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순간의 행복‘에는 함정이 있다. 순간순간의 행복이란 말에는 그때 그때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만 하면 된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자칫 판단력이 흐린 아이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런 점도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오해를 안고 자라게 될 것이며, 이러한 아이들이 사회구성원이 되면, 사회의 앞날이 썩 밝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인격형성,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의 의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지금 당장 사회의 의식구조가 어쩔 수 없어서...라는 핑계로 현재의 아이들을 입시경쟁으로 내몰고 있다면 교육이 현재의 사회 구성원을 길러내는 도구로써 쓰이는 데 불과한 것이다. 교육이 제 역할을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나 답보상태에 머무를 것이다. 교육은 그 미래의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개성을 상실하고, 행복을 찾는 방법조차 모르는 구성원들을 양산하는 도구가 아닌, 아이들에게 가치판단의 능력과 다양한 경험, 모든 대상에 대한 존중, 인격, 인성을 길러줄 수 있는 교육이 현재보다 나은 발전적인 미래의 사회 구성원을 이끌어주는 바람직한 안내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즉,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는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능력과 인격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교육의 역할이 아닐까.
요 근래 대안학교라는 제도를 통해, 몇몇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몇 년 전 나는 TV를 통해 대안학교에 재학 중인 아이들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교실에서의 수업대신 산이나 계곡으로가 들에 핀 꽃들의 이름을 배우고 계곡으로가 물고기를 잡는 등 수학공식, 영어단어 하나를 더 외우는 것 보다는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것들 아니 우리가 입시와 전혀 무관하여 관심조차 갖지 않은 것들을 배우며 진실로 행복해 하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이 뉴스를 접하고 ‘단순히 공부를 하지 않으니 좋은 것 뿐이군’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편협한 도구로서의 생각이다. 다양한 대안학교의 시도를 통해 제도권교육에서 받아들여할 것을 받아들이고, 점차 대안학교가 ‘대안’이 아닌 교육의 새로운 표준이 되는 그날이 우리가 진정 교육을 통해 ‘행복’이라는 것에 한 걸음 더 수월하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날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 2009.01.14 20:20 written by ciwhiz